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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돈 내놔”… “배 째라” … 끔찍한 실태와 그 해법
법률연맹
2009-05-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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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놔”… “배 째라” … 끔찍한 실태와 그 해법
집주인·세입자 분쟁 갈수록 심각… ‘백약이 무효’라 해결 난망… 보증금 차액 주고받는 ‘시장 논리’ 정착 절실
시사저널 金恩男·宋 俊·朴在權 기자
“됐습니다. 필요없어요.” 며칠 전 집을 세 놓으러 동네 복덕방에 들른 회사원 ㄱ씨(서울시 구로구)는, 말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장기를 두고 있던 복덕방 사람들은 ㄱ씨를 흘끗 쳐다보았을 뿐, 앉으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른바 ‘전세 대란’ 이후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이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4월 중순 전국의 아파트 전세값은 지난 연말에 비해 무려 16.1% 가까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세를 놓겠다는 사람은 많으나 세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씨가 마른 이런 상황은, 개업 20년 만에 처음 겪어 본다는 것이 한 복덕방(서울 관악구 봉천동) 주인의 말이다. 그 또한 한 달 전 복덕방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가게를 보러 온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세입자들이 거꾸로 ‘방 빼!’ 요구
올 봄 이사철 들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전세 대란’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9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약 1천3백만 가구)의 46.7%가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세는 63.5%에 달한다. 이들과 계약을 맺고 있는 집주인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 국민 거개가 전세 대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전세 대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는 최대 유행어는 ‘방 빼!’‘못 빼!’였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된 90년 이후 집주인이 전세금을 제멋대로 인상하는 횡포는 크게 줄었다지만, ‘방 빼!’는 여전히 집주인이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관계는 최근 들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우선은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거꾸로 ‘방 빼!’를 외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전세를 사는 ㅇ씨(47)는 최근 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계약금과 중도금을 이미 지불했고, 잔금만 남았다. 그의 전세 계약은 지난 3월 끝이 난 상태. 당초 그는 주인에게 이같은 사실을 통보하고, 보증금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나 잔금을 치르는 날짜가 닥쳤는데도 집주인은 감감 무소식이다.
비슷한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ㅇ씨 같은 처지의 사람들 때문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빈 집이 크게 늘어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지난 11월 이후 입주를 시작한 서울·수도권 인근의 대규모 아파트를 조사한 부동산 전문지 <부동산 뱅크>에 따르면, 이들 아파트 중·대형 평수(38평 이상)의 입주율은 40%를 밑돈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 분양받은 아파트의 잔금을 납부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만큼, 전세 수요가 없으면 빈 집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다.
ㅇ씨의 경우 어떤 상담자이건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하나밖에 없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세입자가 계약 해지를 원할 경우 집주인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현행법에 없다. 따라서 ㅇ씨가 집주인과 합의를 시도하되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민사 조정을 신청하고, 조정마저 결렬되면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충고가 그것이다.
경매 부쳐도 보증금 모두 건지기 어려워
끝내 합의에 실패해 민사 조정 또는 소송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면서, 서울지방법원은 임대차 관련 소송만 전담하는 재판부를 3개 설치해 4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민사 조정만 전담하는 판사도 2명 두고 있다. 이들이 지난 2월과 3월 조정한 건수는 각각 1백14건, 1백55건에 달한다.
문제는 민사 조정이나 소송에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이다(21~22쪽 딸린 기사 참조). 실제로 이를 악용하는 집주인마저 있을 정도이다. 집주인 ㄱ씨는 지난 한 달 세입자의 요구에 밤잠을 설쳤다. 계약 만기를 넘긴 세입자가 ㄱ씨에게 보증금을 빼 주든지, 보증금과 현재 전세 시세와의 차액(전세 차액) 2천만원을 돌려주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시세와 전세 보증금의 차이가 클 때는 그 차액을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 세입자가 내세운 논리였다(이는 민법에 ‘차임증감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다. 단 이와 관련해 나온 판례는 아직 없다). ㄱ씨는 난처했다. 집을 세 놓는다고 나갈 것 같지도 않고, 2천만원을 은행에서 꾸자니 이자를 갚을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ㄱ씨는 최근 법무사와 상담해 자신감을 되찾았다. 법무사는, 세입자가 민사 소송을 진행하도록 방치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ㄱ씨를 안심시켰다. 아무리 전담 재판부가 설치되었다지만 전세금 반환 소송에 걸리는 기간은 4개월 이상이다. 그때 가서 회복된 시세대로 집을 내놓고, 새로 받은 보증금으로 전세금을 반환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법무사의 설명이었다. 이같은 ‘배 째라!’형 집주인이 늘수록 피해를 보는 것은 세입자이다.
민사 조정에 실패해 소송을 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 세입자들이 경매로 집을 팔아 보증금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경매 낙찰가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현실에서는 보증금을 제대로 건지기가 어렵다. 최근 집주인의 부도로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간 세입자들이 겪는 고통은 이를 잘 보여준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주택 공급 줄어 2~3년 뒤 전세값 폭등할 수도
한편 집주인은 집주인대로 ‘배 째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경제난이 닥치기 전만 해도 1억3천만원을 호가하는 28평형 아파트를 서울 시내에 갖고 있던 회사원 ㅂ씨(34). 그는 지난해 이 아파트를 8천만원에 전세 놓고, 자신은 아내의 직장과 가까운 동네에서 5천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주인 겸 세입자인 셈이다.
그는 최근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난 데다, 지난 3월로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가 현재 시세와의 전세 차액 2천만원을 돌려 달라고 거의 날마다 전화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세입자는 한 술 더 떠, 차액을 돌려주고 벽지와 장판까지 새로 해 주면 ‘계속 살아 주겠다’는 아량까지 보였다. ㅂ씨가 회사 부도 사실을 알리고 통사정을 해도 세입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면 벽지는 빼주겠다’는 정도였다. 이쯤되자 ㅂ씨는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2년 전 살고 있던 단독 주택을 허물고 다가구 주택을 새로 지은 회사원 ㅇ씨(서울 관악구 봉천동)는 요즘 밤이 늦어야만 귀가한다. 계단을 오를 때면 세입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발소리마저 죽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든 가구 대부분이 보증금을 빼 달라거나 전세 차액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감봉으로 한달 수입이 30% 가까이 줄어든 그로서는 주택을 신축할 때 빌려 쓴 은행 빚의 이자를 갚는 일만도 힘에 부친다. 그렇다고 그가 세입자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세 들 때 사정이 어렵다고 해 다른 집보다 보증금을 2백만원 낮추어 주었던 세입자마저 매몰차게 나오는 것을 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최근 들어 임대차 분쟁 상담과 관련해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집주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라고 상담 기관 직원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 길병수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집주인이 상담실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임대차와 관련한 상담 10건 중 2건 비율로 집주인들이 상담을 요청한다”라고 말했다. 개중에는 세입자의 부당한 요구로 고통받는 집주인도 적지 않다는 것이 법률소비자연맹 홍금애 실장의 지적이다.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도둑이 들었다는 이유로 집에 하자가 있다며 집을 나가겠다는 세입자가 있을 정도이다.
결국 전세값이 폭락한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피해자는 어느 일방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전세값이 떨어져 세입자가 유리한 듯하지만 주택 공급 물량이 딸리면 다시 전세값이 폭등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조흥경제연구소는 지금처럼 건설업체들이 잇달아 쓰러지고 기존 업체마저 사업을 지연시키면 2∼3년 뒤에는 주택 공급 물량이 당초 목표치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세 대란이 복합 불황으로 이어지면 경제가 파탄 날 수도 있다(20쪽 상자 기사 참조).
이에 따라 국토개발연구원 윤주현 연구위원은 지난 4월 중순 전세 대란을 풀 해법 네 가지를 제안했다. △세입자가 굳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될 경우, 현재 시세와의 전세 차액을 집 주인이 빌린 것으로 치고 이에 대한 이자를 세입자에게 지불하는 ‘역월세’ 방식 △세입자가 이사해야 할 경우, 국민주택기금에서 연 2천억원 정도를 2년간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에 출연한 뒤, 전세금 반환에 필요한 금액을 일반 금융기관이 집주인에게 빌려주고 신용보증기금이 이에 대한 보증을 서는 방식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7천억원 정도의 종자돈을 2개월 가량 단기 차입하는 형식으로 국채를 발행한 다음, 신용보증기금이 세입자의 전세금을 먼저 지불해 주고 나중에 집주인에게서 받아내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월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은 재원 마련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다. 대한주택경제연구소 이종근 소장은 “금융 경색이 전세 대란을 부른 주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지원으로 전세 문제를 풀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봄·가을 이사철에 오가는 전세금은 대략 50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10%만 전세금 분쟁에 휘말려도 5조원 가량이 들먹거릴 판인데, 7천억원 규모의 기금으로 이를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경제 정의 차원에서도 이같은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택연구소 김용순 연구원의 지적이다. 과거에는 집주인이 전세값 인상을 주도하면, 세입자들은 죽기 살기로 인상분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다면 전세값이 내려간 지금은 집주인이 전세 차액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균형이 맞는다는 것이다.
결국 전세값도 이제는 외부 개입 없이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부동산 전문가 김우희씨(<부동산 뱅크> 편집장)의 지적이다. 국토개발연구원이 내놓은 대안 가운데 역월세가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세가 오르면 오른 대로,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집주인과 세입자가 협의해서 차액을 주고받고 재계약을 맺는 방식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경직된 전세 제도로는 주택 여건의 변화를 탄력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22~23쪽 딸린 기사 참조).
하반기에는 전세 대란 진정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즈음에는 전세 대란이 진정되지 않겠느냐고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세 대란을 겪으며 집주인도 세입자도 타협점을 미리 준비하는 노하우를 익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변화의 징후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말 YMCA 시민중계실 길병수씨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세입자에게 전세 차액을 돌려주고 싶은데, 어떤 절차와 방식을 거치는 것이 좋겠느냐는 부금자씨(38)의 전화였다. 부씨는 2년 전 청약으로 분양받은 27평짜리 아파트(서울 강남구 일원동)를 전세로 내주고, 자신은 인근 13평짜리 아파트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부씨가 일원동 아파트를 세입자에게 내줄 당시 전세값은 1억1천만원. 현재 시세는 8천만원까지 내려간 상태이다. 집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는 부씨는, 그러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니 세입자들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 싶어 차액을 돌려줄 방법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세입자에게 돌려줄 차액을 만들 작정이다.
인식의 대전환을 이룬 집주인과 세입자가 늘어날수록 전세 대란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려 갈 전망이다. 시장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은 결국 소비자 개개인의 합리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세입자 분쟁 갈수록 심각… ‘백약이 무효’라 해결 난망… 보증금 차액 주고받는 ‘시장 논리’ 정착 절실
시사저널 金恩男·宋 俊·朴在權 기자
“됐습니다. 필요없어요.” 며칠 전 집을 세 놓으러 동네 복덕방에 들른 회사원 ㄱ씨(서울시 구로구)는, 말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장기를 두고 있던 복덕방 사람들은 ㄱ씨를 흘끗 쳐다보았을 뿐, 앉으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른바 ‘전세 대란’ 이후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이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4월 중순 전국의 아파트 전세값은 지난 연말에 비해 무려 16.1% 가까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세를 놓겠다는 사람은 많으나 세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씨가 마른 이런 상황은, 개업 20년 만에 처음 겪어 본다는 것이 한 복덕방(서울 관악구 봉천동) 주인의 말이다. 그 또한 한 달 전 복덕방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가게를 보러 온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세입자들이 거꾸로 ‘방 빼!’ 요구
올 봄 이사철 들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전세 대란’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9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약 1천3백만 가구)의 46.7%가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세는 63.5%에 달한다. 이들과 계약을 맺고 있는 집주인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 국민 거개가 전세 대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전세 대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는 최대 유행어는 ‘방 빼!’‘못 빼!’였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된 90년 이후 집주인이 전세금을 제멋대로 인상하는 횡포는 크게 줄었다지만, ‘방 빼!’는 여전히 집주인이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관계는 최근 들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우선은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거꾸로 ‘방 빼!’를 외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전세를 사는 ㅇ씨(47)는 최근 주택을 한 채 구입했다. 계약금과 중도금을 이미 지불했고, 잔금만 남았다. 그의 전세 계약은 지난 3월 끝이 난 상태. 당초 그는 주인에게 이같은 사실을 통보하고, 보증금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나 잔금을 치르는 날짜가 닥쳤는데도 집주인은 감감 무소식이다.
비슷한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ㅇ씨 같은 처지의 사람들 때문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빈 집이 크게 늘어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지난 11월 이후 입주를 시작한 서울·수도권 인근의 대규모 아파트를 조사한 부동산 전문지 <부동산 뱅크>에 따르면, 이들 아파트 중·대형 평수(38평 이상)의 입주율은 40%를 밑돈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 분양받은 아파트의 잔금을 납부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만큼, 전세 수요가 없으면 빈 집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다.
ㅇ씨의 경우 어떤 상담자이건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하나밖에 없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 세입자가 계약 해지를 원할 경우 집주인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현행법에 없다. 따라서 ㅇ씨가 집주인과 합의를 시도하되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민사 조정을 신청하고, 조정마저 결렬되면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충고가 그것이다.
경매 부쳐도 보증금 모두 건지기 어려워
끝내 합의에 실패해 민사 조정 또는 소송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면서, 서울지방법원은 임대차 관련 소송만 전담하는 재판부를 3개 설치해 4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민사 조정만 전담하는 판사도 2명 두고 있다. 이들이 지난 2월과 3월 조정한 건수는 각각 1백14건, 1백55건에 달한다.
문제는 민사 조정이나 소송에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이다(21~22쪽 딸린 기사 참조). 실제로 이를 악용하는 집주인마저 있을 정도이다. 집주인 ㄱ씨는 지난 한 달 세입자의 요구에 밤잠을 설쳤다. 계약 만기를 넘긴 세입자가 ㄱ씨에게 보증금을 빼 주든지, 보증금과 현재 전세 시세와의 차액(전세 차액) 2천만원을 돌려주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시세와 전세 보증금의 차이가 클 때는 그 차액을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 세입자가 내세운 논리였다(이는 민법에 ‘차임증감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다. 단 이와 관련해 나온 판례는 아직 없다). ㄱ씨는 난처했다. 집을 세 놓는다고 나갈 것 같지도 않고, 2천만원을 은행에서 꾸자니 이자를 갚을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ㄱ씨는 최근 법무사와 상담해 자신감을 되찾았다. 법무사는, 세입자가 민사 소송을 진행하도록 방치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ㄱ씨를 안심시켰다. 아무리 전담 재판부가 설치되었다지만 전세금 반환 소송에 걸리는 기간은 4개월 이상이다. 그때 가서 회복된 시세대로 집을 내놓고, 새로 받은 보증금으로 전세금을 반환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법무사의 설명이었다. 이같은 ‘배 째라!’형 집주인이 늘수록 피해를 보는 것은 세입자이다.
민사 조정에 실패해 소송을 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 세입자들이 경매로 집을 팔아 보증금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경매 낙찰가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현실에서는 보증금을 제대로 건지기가 어렵다. 최근 집주인의 부도로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간 세입자들이 겪는 고통은 이를 잘 보여준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주택 공급 줄어 2~3년 뒤 전세값 폭등할 수도
한편 집주인은 집주인대로 ‘배 째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경제난이 닥치기 전만 해도 1억3천만원을 호가하는 28평형 아파트를 서울 시내에 갖고 있던 회사원 ㅂ씨(34). 그는 지난해 이 아파트를 8천만원에 전세 놓고, 자신은 아내의 직장과 가까운 동네에서 5천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주인 겸 세입자인 셈이다.
그는 최근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난 데다, 지난 3월로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가 현재 시세와의 전세 차액 2천만원을 돌려 달라고 거의 날마다 전화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세입자는 한 술 더 떠, 차액을 돌려주고 벽지와 장판까지 새로 해 주면 ‘계속 살아 주겠다’는 아량까지 보였다. ㅂ씨가 회사 부도 사실을 알리고 통사정을 해도 세입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렇다면 벽지는 빼주겠다’는 정도였다. 이쯤되자 ㅂ씨는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2년 전 살고 있던 단독 주택을 허물고 다가구 주택을 새로 지은 회사원 ㅇ씨(서울 관악구 봉천동)는 요즘 밤이 늦어야만 귀가한다. 계단을 오를 때면 세입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발소리마저 죽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든 가구 대부분이 보증금을 빼 달라거나 전세 차액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감봉으로 한달 수입이 30% 가까이 줄어든 그로서는 주택을 신축할 때 빌려 쓴 은행 빚의 이자를 갚는 일만도 힘에 부친다. 그렇다고 그가 세입자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세 들 때 사정이 어렵다고 해 다른 집보다 보증금을 2백만원 낮추어 주었던 세입자마저 매몰차게 나오는 것을 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최근 들어 임대차 분쟁 상담과 관련해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이 집주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라고 상담 기관 직원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 길병수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집주인이 상담실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임대차와 관련한 상담 10건 중 2건 비율로 집주인들이 상담을 요청한다”라고 말했다. 개중에는 세입자의 부당한 요구로 고통받는 집주인도 적지 않다는 것이 법률소비자연맹 홍금애 실장의 지적이다. 아직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도둑이 들었다는 이유로 집에 하자가 있다며 집을 나가겠다는 세입자가 있을 정도이다.
결국 전세값이 폭락한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피해자는 어느 일방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전세값이 떨어져 세입자가 유리한 듯하지만 주택 공급 물량이 딸리면 다시 전세값이 폭등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조흥경제연구소는 지금처럼 건설업체들이 잇달아 쓰러지고 기존 업체마저 사업을 지연시키면 2∼3년 뒤에는 주택 공급 물량이 당초 목표치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세 대란이 복합 불황으로 이어지면 경제가 파탄 날 수도 있다(20쪽 상자 기사 참조).
이에 따라 국토개발연구원 윤주현 연구위원은 지난 4월 중순 전세 대란을 풀 해법 네 가지를 제안했다. △세입자가 굳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될 경우, 현재 시세와의 전세 차액을 집 주인이 빌린 것으로 치고 이에 대한 이자를 세입자에게 지불하는 ‘역월세’ 방식 △세입자가 이사해야 할 경우, 국민주택기금에서 연 2천억원 정도를 2년간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에 출연한 뒤, 전세금 반환에 필요한 금액을 일반 금융기관이 집주인에게 빌려주고 신용보증기금이 이에 대한 보증을 서는 방식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7천억원 정도의 종자돈을 2개월 가량 단기 차입하는 형식으로 국채를 발행한 다음, 신용보증기금이 세입자의 전세금을 먼저 지불해 주고 나중에 집주인에게서 받아내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월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은 재원 마련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다. 대한주택경제연구소 이종근 소장은 “금융 경색이 전세 대란을 부른 주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지원으로 전세 문제를 풀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봄·가을 이사철에 오가는 전세금은 대략 50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10%만 전세금 분쟁에 휘말려도 5조원 가량이 들먹거릴 판인데, 7천억원 규모의 기금으로 이를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경제 정의 차원에서도 이같은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택연구소 김용순 연구원의 지적이다. 과거에는 집주인이 전세값 인상을 주도하면, 세입자들은 죽기 살기로 인상분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다면 전세값이 내려간 지금은 집주인이 전세 차액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균형이 맞는다는 것이다.
결국 전세값도 이제는 외부 개입 없이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부동산 전문가 김우희씨(<부동산 뱅크> 편집장)의 지적이다. 국토개발연구원이 내놓은 대안 가운데 역월세가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세가 오르면 오른 대로,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집주인과 세입자가 협의해서 차액을 주고받고 재계약을 맺는 방식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경직된 전세 제도로는 주택 여건의 변화를 탄력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근원적인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22~23쪽 딸린 기사 참조).
하반기에는 전세 대란 진정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즈음에는 전세 대란이 진정되지 않겠느냐고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세 대란을 겪으며 집주인도 세입자도 타협점을 미리 준비하는 노하우를 익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변화의 징후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말 YMCA 시민중계실 길병수씨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세입자에게 전세 차액을 돌려주고 싶은데, 어떤 절차와 방식을 거치는 것이 좋겠느냐는 부금자씨(38)의 전화였다. 부씨는 2년 전 청약으로 분양받은 27평짜리 아파트(서울 강남구 일원동)를 전세로 내주고, 자신은 인근 13평짜리 아파트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부씨가 일원동 아파트를 세입자에게 내줄 당시 전세값은 1억1천만원. 현재 시세는 8천만원까지 내려간 상태이다. 집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는 부씨는, 그러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니 세입자들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 싶어 차액을 돌려줄 방법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세입자에게 돌려줄 차액을 만들 작정이다.
인식의 대전환을 이룬 집주인과 세입자가 늘어날수록 전세 대란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려 갈 전망이다. 시장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은 결국 소비자 개개인의 합리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